"예술은 소유 아닌 공유" CI 디자인 거장 구정순 동문의 철학 깃든 구하우스 미술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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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커뮤니케이션팀
- 인터뷰자
- 작성일 2025-07-25
- 구정순 구하우스 미술관 관장(응용미술과 70) 인터뷰
"디자인은 단순히 꾸미는 일이 아니라 사회를 이해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예술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공유하는 것이죠."
구정순 동문(응용미술과 70)은 국내 유수의 기업 브랜딩을 이끌어 온 1세대 CI 디자이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LG의 전신 '금성사', 'KB 국민은행', 'KBS' 같은 로고와 이름 뒤에는 늘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그의 뚝심과 고민이 담겨 있다.
그는 이제 자신만의 취향이 담긴 수집품을 전시하는 구하우스 미술관의 관장으로 예술 공유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예술과 디자인, 개인과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며 유일무이한 길을 걷고 있는 구정순 동문의 발자취를 숙명통신원이 따라가봤다.
1. 안녕하세요 동문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디자인포커스의 대표이사이자, 2016년 개관한 구하우스 미술관을 운영하는 구정순입니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는 응용미술을 전공했습니다.
2. 1983년 금성사 CI 개발을 시작으로 KBS, 국민은행, 코엑스 등 여러 대형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표적인 1세대 CI 디자이너인데요.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유난히 힘이 들었던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국민은행의 사례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다들 'KB'라는 이니셜이 익숙하겠지만, 사실 제가 제안한 것이었어요.
당시 국민은행은 주택은행과의 합병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이름도 필요했죠. 클라이언트와 수많은 의견을 나누고, 혼자서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사람들이 긴 이름을 기억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에 '한국방송공사'를 모두 'KBS'라고 부르듯이, 'Kukmin Bank'를 줄여서 'KB'로 가자는 제안을 했고, 원래 이름인 국민은행은 작게 표기하고 'KB'를 크게 써서 KB로 읽게 했습니다.
이 작업을 마치고 나니 국민은행 측에서도 매우 만족스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순히 로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이미지를 바꾸고 사회적 인식을 설계하는 일이었기에 저에게도 보람이 컸습니다.
3. 숙명여대 재학 시절 현재의 동문님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준 에피소드를 소개해주세요.
4학년 여름 방학부터 취업 준비를 시작했는데, 대기업의 채용시험 응시 조건이 '군필자'였어요. 분명 저도 똑같이 공부했는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납득이 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직접 홍보실에 찾아가 "나는 충분히 이 일을 해낼 수 있는데, 왜 응시 자격이 없습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그 뒤 어느 날 학과장님께서 저를 부르셨고,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학교에 아주 당돌하고 똑똑한 학생이 있더라"라면서요. 결국 예외적으로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5800명 중 유일한 여성으로 응시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제게 큰 자신감을 주었어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고, 직접 확인하고 해결해 보려는 태도가 지금까지도 제 일을 이끄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4. '구하우스 미술관'이라는 이름처럼 실제 이곳에서 거주하신다고 들었어요. 미술관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스위스 바젤에 있는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에 방문했을 때였어요. 예술이 사적인 컬렉션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와 함께 호흡하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큰 영감을 받았어요. 그 이후로 예술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공유하는 것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고, 언젠가 그런 미술관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죠.
마침, 양평에 땅이 있었고, 서울에서도 가까워 사람들이 오가기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곳에 집을 지어 미술관처럼 개방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정원에 물을 주고 라운지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 방문객들이 편히 오가며 작품을 보는 모습이 좋았어요. 예술이 삶 속에 스며드는 것,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5. 박수근 작가의 드로잉을 구매하며 수집을 시작하셨다고요. 동문님에게 이 작품이 가지는 의미가 궁금해요.
제가 드로잉을 구매했던 1973년 당시에는 박수근 작가가 지금처럼 국민화가로 평가받을 줄 몰랐어요. 그래서 사실 제가 구매한 박수근 작가의 그림에는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작품이 좋아서 샀습니다. 한 달을 고민하다가 첫 직장에서 받은 보너스 20만원에 사비를 더해 구입했어요.
6. 구하우스의 상설전은 모두 동문님의 수집품인데요. 작품을 수집하는 동문님만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그림에 담긴 스토리텔링과 시대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요즘 단색화가 유행이지만, 저는 그런 작품을 여러 점 봐도 다 비슷하게 느껴져요.
우리 사회는 전쟁, 혼돈, 위기 상황을 이겨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죠. 이런 시대의 모습과 이야기의 깊이를 담은 그림, 작가의 생각과 감정이 진하게 배어 있는 작품에 마음이 갑니다. 박수근 선생님의 드로잉도 소박하고 담백하면서 그 속에 깊은 이야기가 스며 있어요. 그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삶과 연결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 구하우스에서 '예술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요?
미술관에서 많은 분이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하고, 예술을 가까이에서 느끼게 하는 것이 곧 실천입니다.
우리는 원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언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걸 다시 사회에 환원하고 나누는 일은 저에게 자연스러운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을 콘셉트로 하는 우리 미술관에서 많은 분이 편안한 마음으로 예술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8. 직접 미술관을 운영해 보니 디자이너 일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저에게 디자인은 직업의 영역이고, 미술관 운영은 아트 컬렉터의 영역입니다. 저는 디자인과 예술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와 목적이 명확합니다. 철저한 사전조사와 분석을 통해 그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에요. 일종의 사회과학에 가까운 작업이죠.
반면 예술은 훨씬 자율적이고 개인적이에요. 내가 느낀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일입니다. 디자인과 예술은 서로 다른 성격의 영역이지만, 그만큼 느껴지는 매력도 다르죠.
9. 평소 예술은 생활에 녹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동문님이 추천하는 일상 속 예술을 즐기는 방법을 소개해주세요.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눈과 취향 즉, '테이스트(Taste)'를 찾는 것이 중요해요. 요즘에는 남들을 따라서 사는 경우가 많아요. 명품도 그렇고, 일부 아트 컬렉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선택하는 감각을 기르는 게 중요합니다. 타고나는 부분도 있겠지만, 노력으로 키워야 해요. 자꾸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취향을 찾아보세요. 그것이 예술이 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길입니다.
10. 오랜 기간 디자인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셨습니다. 앞으로 동문님이 이루고 싶은 목표나 비전은 무엇인가요?
디자인은 단순한 '데코'가 아닙니다. 단순히 무언가를 꾸미는 일에서 멈추지 않고,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철학은 제가 지금까지 가져왔고, 또한 앞으로도 실천해야 할 인생의 과제죠. 예술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삶에 좋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 이것이 제가 계속 이어가고 싶은 길입니다.
11. 마지막으로, 동문님처럼 당당하고 자신만의 색깔로 빛나는 여성 리더로 성장하고픈 숙명인들에게 따뜻한 격려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당당해지려면,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힘부터 길러야 해요.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사실 많이 없어요. 대부분 작은 불합리조차 그냥 관습에 따르는데, 그러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일단 부딪쳐보세요. 한 번 돌파구를 만들어 보고 나면 점차 자신감이 생깁니다. 저 역시 대학 시절의 작은 시도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씩 도전해 보세요.
취재: 숙명통신원 23기 우지윤(한국어문학부 24), 조준희(정치외교학과 23)
정리: 커뮤니케이션팀